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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인연 - 05 영태의 자리는 에어컨에서 세번째 떨어진 줄 중앙에 있다. 에어컨 바람이 가장 시원하게 들이치는 곳이다. 물론 겨울엔 온풍이 불어 따뜻하다. 사실 졸리다. 어쨌든 영태가 그 좋은 자기 자리로 향하던 중이었다. "끼이익~ 콰당!" 등받이의 갈라진 나뭇결에 셔츠자락이 끼어 의자를 잡아 끌어 넘어뜨렸다. 지연은 무심결에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로 옆자리 책상에 대출중이던 그 책이 있었다. 잠시 시선이 머문 순간부터 가슴 깊숙한 곳에서 물결치듯 흥분이 일었다. 늘 다니던 곳이다. 일부러 끼우기도 어려울 것 같은 곳에 셔츠자락이 끼었다. 몇 안돼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상상한 영태는 창피했다. '아, 쪽팔려' 영태는 의자를 일으켜 세우다 자신을 보고 있는 여자를 보았다. 어색한 눈웃음을 지어보이고 자리.. 더보기
인연 - 04 지연은 다음날 일찍 일어나 도서관엘 갔다. 당분간 학교보다는 도서관에 들를 생각이다. 서가에 들러 책이 반납 됐는지 검색해 봤지만, 역시 대출중이다. '재미도 없는 책을 누가 빌려 갔을까?' 딱히 기대는 안했지만, 약간의 실망감에 입술에 힘이 갔다. 서가에서 나와 일반인실로 들어 갔다. 에어컨 근처의 좋은 자리는 대부분 임자가 있는 듯 했다. 물론 그 주인들은 대부분 오지 않은 것 같았다. 지연은 빈자리를 찾아 앉고 책을 폈다. '이자식 많이 아픈가?' 영태는 병수의 빈 고정석을 힐끗 보며, 병수가 늦는 것에 신경이 좀 쓰였다. "병수야! 너 다리를 왜 그렇게 절어?" 병수는 모른척 티 안나게 나오려 했지만, 엄마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아.. 어제 도서관 계단에서 삐끗했어." 습관처럼 둘러 말했다.. 더보기
인연 - 03 늘 그렇듯이 저녁을 먹은 병수는 영태와 함께 농구를 하고 들어왔다. 땀에 흠뻑 젖은 면티가 몸에 달라 붙었다. 둘은 화장실에서 땀을 씻어내고 나왔다. 머리 끝에서 땀인지 물인지 물방울이 송글 맺혔다가 떨어진다. 열기로 붉게 상기된 얼굴은 한참 있어야 가라앉을 태세다. 자판기에서 게토레이 한 캔을 뽑아 한모금씩 돌려 마신다. "아까 떨어지다가 삐끗한 발목이 살짝 쑤시네" 병수가 게임중에 착지를 잘 못한 모양이었다. "울 엄마 친구가 한의원 하는데 가볼래? 나도 가끔 거기서 침 맞는데, 침 맞으면 괜찮아지더라" "한 두번도 아니고 괜찮겠지.. 오늘은 좀 일찍 들어가야겠다." "야, 파스라도 붙이고 좀 더 있다 가" 오늘은 가뜩이나 싱숭생숭하던 영태다. "그냥 갈랜다. 좀 남았냐?" 병수가 갈증이 덜 풀렸나보.. 더보기
인연 - 02 영태는 어느새 다 마셔버린 캔을 쪽쪽 빨고 있다. "들어가서 공부나 하자!" 병수가 건너편 휴지통에 빈 캔을 던지며 휴게실을 먼저 나갔다. 영태는 답답한 마음에 의자를 두 손으로 짚으며 일어선다. "그래! 들어가서 책이나 보자" "슛~!" "탁! 툭!" '아이씨..' 일부러 문까지 걸어가서 캔을 던져보았지만, 휴지통 테두리에 맞고 떨어졌다. 병수는 조심조심 가방을 열고 책을 꺼내 놓았다. '성격과 직업의 상관관계' 지난주에 2주 기한으로 빌린 책이다. 병수는 한냥대학교 아시아와유럽및아메리카역사문화학과를 4.5점 만점에 3.9점이라는 성적으로 졸업했다. 나름대로 우수한 성적이지만, 웬만한 기업에서 '어서 오세요'하고 받아 줄 만한 인기학과는 아니다. 아직 도서관 신세를 면하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생.. 더보기
인연 - 01 찌는 듯한 더위다. 어제까지 보름 넘게 내리던 비는 벌써 다 말라 버렸다. 버스 정류장에서 도서관까지는 10분 남짓 걸어야 한다. 아침부터 내리쬐는 태양을 피해 응달을 찾아 걸어보지만, 바라지 않던 땀 한 줄기가 등골을 타고 내린다. 아침 일찍부터 사람들이 옥수수알 처럼 도서관에 자리를 틀고 앉아있다. 도서관 구석에 세워진 에어컨이 작아 보인다. 에어컨과 먼 곳에 앉은 사람들은 연신 부채질을 하지만 허망한 손놀림일뿐, 더위는 쉽게 떠나지 않을 것 같다. "왔냐?" 벌써 그 자리에서 3년째 공무원시험을 준비중인 영태다. "일찍 나왔네? 오늘 무척 덥다. 어제까진 비좀 그쳤으면 했는데, 비가 그리워 질 것 같아" 가방을 책상에 올려 놓으며 병수가 대꾸했다. "나와!" 영태는 눈짓을 하며 휴게실로 향한다. 병..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