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 11

8시가 가까워지도록 조부장이 퇴근을 안하고 있다.

지난주 중국에서 수입해온 원자제가 아직 세관을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애초 신고했던 수입물량보다 컨테이너 한개분량의 물량을 더 들여왔는데, 새로 바뀐 관세청 직원이 문제삼았기 때문이다.

원자제가 일정대로 수급되지 않아서 클라이언트로부터도 클레임을 받고 있는데다, 나름 규모가 큰 계약이어서 회사로서도 잘 헤쳐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다.

병수는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실행시켰다가 끄기를 버릇처럼 반복했다.

'윙~~'

'아직 더 있어야돼?'

'조부장이아직집에안갔어-_-;;' 송신버튼을 꾸욱 눌렀다.

'윙~~'

'그냥나오면안돼?'

'알잖아미안해어디들어가서밥먼저먹어^^;'

얄미운 김과장은 박연서 대리를 데리고 일찌감치 퇴근했다.

병수는 아직 신참이어서 하늘 같은 상사들이 자리를 지키면 일어날 수가 없었다.

'꼬르륵~'

가장 정확하다는 신체시계는 6시 30분을 넘기면서 고장 난 듯 종을 쳐댔다.

어딘가 전화를 걸던 조부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병수는 황급히 이메일을 켜고 저녁에 들어온 메일을 확인 하는 시늉을 했다.

조부장은 아직 자리에 있는 부하직원들을 둘러보고 사무실을 나갔다.

조부장은 2개월도 안된 신입인 병수에겐 눈길도 주지 않았다.

'자! 우리도 그만 들어가죠!' 2팀에 있는 최과장이 답답했을 동료들의 속을 달래주었다.

병수는 제빨리 컴퓨터를 끄고 가방을 둘렀다.

'지금 나가!' 꾸욱~!

병수가 도착할 시간에 맞춰 지연은 교문 앞에 나왔다.

한결 서늘해진 바람이 병수의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땀을 실어갔다.

'미안해 부장이 퇴근을 안해서... 밥은 먹었어?'

'아니 배고파.'

지연은 9시가 넘도록 저녁을 미루고 있었다.

학교 앞에 즐비하게 늘어선 호프집에서 고소한 닭튀기는 냄새가 주린 배를 자극했다.

병수는 지연의 손을 감아쥐고 1층에 자리한 호프집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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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 10

커튼이 바람에 날릴 때마다 비추는 햇살에 눈을 떴다.

오랜만에 늦은 밤까지 마신 술이 늦은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병수의 뒷머리를 잡아끌었다.

'아, 머리 아퍼.. 오늘 연락 하라고 하셨지..'

아침일찍부터 구립에 나온 지연은 사람들이 열람실로 들어 올 때마다 신경이 쓰이고 있다.

'무슨 관계일까?'

지연의 손엔 손 땀이 묻은 하얀 명함 한 장이 들려있다.

지갑속에 있어야 할 명함이 없다.

'아!'

짧은 탄성이 입 밖으로 나오기 전에 이미 종결된 사건의 전모가 머릿속에 스쳐지나갔다.

지하철에서 명함을 꺼내 보고는 습관처럼 보던 책에 끼워 넣었고 그대로 반납을 해버린 터였다.

황급히 옷을 걸치고 나와 구립으로 가는 마을 버스를 탔다.

다리도 걷기에 크게 불편이 없을 만큼 좋아져있었다.

햇살은 따가웠지만, 등을 치고 지나가는 바람은 선선했다.

뛰 듯 걸어 들어간 열람실에 그녀의 시선과 마주쳤다.

'아! 있다.'

'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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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 09

"혹..시 저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걸음을 멈춘 병수가 언짢은 듯 물었다.

"아.. 아니에요."

"절 따라오시는 것 같아서... 아니면 쏘리요."

"저! 잠시만요."

돌아서는 병수를 불러세웠다.

"실은.. 들고 있는 그 책.."

"그 책 어디서 구입하셨어요?"

들고 있는 책에 시선이 따라갔다.

"산건 아니고 동네 도서관에서 빌린건데.. 왜요?"

'아!' 순간 구립 옆자리 기분 나쁜 남자와 함께 절룩이며 휴게실을 나가던 남자가 떠올랐다.

"저..."

"네?"

"이 학교 학생이세요?"

"아니요. 전에 학생이었죠. 왜 묻죠?"

"아니.. 아니에요."

"-_  -;; 그럼 전 이만."

병수는 땀에 젖어 달라 붙은 청바지를 손으로 잡아 털고 뒤 돌아 학교길을 걸어 나왔다.

'아! ㅎㅎㅎ 그 여자였네!'

돌아 오는 지하철에서 그 손자국 났던 옆자리 여자가 떠올랐다.

지연은 매미 울음이 뒤섞인 열기 사이로 사라지는 남자를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다시 구립으로 향했다.

병수는 꿀꿀해진 기분을 달랠 겸 영태를 만나러 왔다.

"드드드드득... 드드드드득..."

'자식 전화 안받고 뭐하는 거야...?'

가방이 축 늘어지게 걸린 의자는 삐딱하게 나와 있다.

'또 농구 하러 간거냐?'

도서관을 나오면 쓰러질 듯 낡은 농구골대 한개가 온 힘을 다해 버티고 섰다.

"영태야!"

"왔냐? 잠시만! 3점 남았어."

영태가 빠른 놀림으로 공을 튀기며 힐 끗 목소리를 던진다.

아이스크림이 녹아 말라있는 벤치 한 켠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한나절 달아오른 지열이 송글송글 굵은 땀방울을 그새 뽑아 내린다.

"쏴아~"

수도꼭지가 부러져라 물을 틀고 머리를 식힌 영태가 땀에 절은 면티의 아랫단을 잡아 얼굴을 훔쳤다.

"왠 일이야? 이 시간에.."

"나, 시험 준비 그만하고 취직할까봐.."

"ㅋㅋ 집에서 더 못 버티겠냐?"

"아니.. 그 것보다.."

"오늘 삼촌 만나고 왔는데..."

"음.. 그래? 잘 됐네.. 맥주나 한 잔 하러 가자!"

"잠깐 나 책좀 반납하고 올께.."

"야, 들어가는 김에 내 가방도 갖고 나와라."

병수의 자리에 낮에 학교에서 보았던 여자가 앉아있다.

"거기... 제 자린데요?"

"알아요."

"---;;; 정말 저한테 무슨 볼 일 있어요?"

"실은 그 책에요."

"이 책요? 이 책 지금 반납 하려던 참인데요.. 왜 그러시죠?"

"아 그래요? 제가 좀 필요해서 빌려 보려했어요. 반납 하신다니 잘 됐네요."

"아, 네.. 그럼 제가 반납할테니 빌려가시면 되겠네요. 가시죠!"

병수는 지연과 함께 어색한 시간을 걸어 책을 주고 받았다.

지연은 짧은 목례와 함께 계단을 돌아 내려갔다.

영태가 서 있는 정문 앞으로 그 녀가 스쳐 갔다.

그 녀가 돌아간 담벼락을 모퉁이를 보는 동안 병수가 가방을 들고 나왔다.

"뭘 그렇게 보냐?"

"어? 아냐! 가자~ 이게 얼마만이냐? ㅋ"

도서관을 한참 걸어나온 끝에는 간혹 사람이 걸어와 무언가를 기다리고 커다란 네모상자를 타고 내리는 버스 정류장과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을 이름의 편의점이 있다.

둘은 가끔 그 세상에 하나밖에 없을 편의점에 들러 목을 축이곤 했다.

병수는 캔 맥주 네개를 집어 들었다.

이미 그 둘이 엉덩이를 비벼 영역표시를 해 둔 버스 정류장 벤치에 앉아 캔을 땄다.

귀뚜라미와 풀벌레가 세상을 장악한 이 시간에도 여름은 더웠다.

목줄기를 타고 내리는 맥주와 함께 땀방울이 흘렀다.

"뭐 하는 회사야?"

"무슨 무역회사라던데.. 잘나가는 회사라곤 하는데.. 비젼은 모르겠고..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언제부터 나오래냐?"

"아직 면접도 안봤어. 모레 면접 보러 가야돼."

"에혀... 너 가면 누구랑 농구하냐? ㅋㅋ"

"암튼 잘 되길 바란다."

"그래. 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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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 08

한 모금 남은 커피캔을 들고 자리로 돌아 왔다.

책상에 티슈를 한 장 꺼내 접어서 깔고 캔을 내려놓았다.

버릇처럼 옆자리를 힐끗 보고 의자에 앉으려는데, 며칠간 옆자리에 있던 책이 보이지 않았다.

슬몃 화가 났다. 며칠간 나름 신경써서 주시하던 그녀였다.

급히 열람실로 가서 도서검색을 해보았다. [.... 대출중]

허탈한 걸음으로 자리로 돌아왔다.

옆자리에 있는 책들이 하나 둘 눈에 들어왔다.

흔히 보는 영어책들과 사전이 있다.

'모 하는 인간이야!'

주위를 둘러봤다.

멀뚱멀뚱 눈 앞 30cm에 시선이 고정되어 다른 생각 다른 것이 보이지 않았다.

안되겠다 생각이 들어서 가방에 쓸어 담듯 책을 넣고 일어섰다.

도서관 밖에는 한여름 뜨거운 태양이 딱 사람 콧구멍 높이만큼 공기를 뜨겁게 데워놓았다.

옆자리 그 인간이 기분 나쁜 시선으로 쳐다보고 지나간다.



"다리가 왜 그러냐?"

"농구 하다가 다쳤어..요"

"커피 한 잔 할래?"

"네.."

외삼촌의 호출로 1년 반만에 다시 찾은 학교다.

"어머니가 걱정이 많으시더라."

"..." 이럴때가 성공한 사람들 앞에서 가장 자신이 없어지는 순간이다.

김이 오르는 종이컵 앞에 명함을 내려 놓으셨다.

[한강무역 CEO 나한강]

"선배가 운영하는 무역회사인데 특별히 부탁했으니까 연락하고 찾아가봐"

"고맙습.."

"똑!똑!"

랩실로 향하던 지연은 교수님 방 앞을 지나가다 [재중]이란 표시를 보고 문을 두드렸다.

"네!"

역시 문 안쪽에서 교수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지연이구나!"

"시골 내려가셨다고 들었는데 계신 거 같아서 혹시나 하고 들렀어요."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낯 선 남자가 풀죽은 자세로 돌아 앉아 있다.

병수는 지금이다 싶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외삼촌 갈께요."

명함을 지갑에 꽂아 넣고, 탁자에 올려두었던 책을 집어 들었다.

그 힘 들어간 손가락 끝에 지연이 며칠간 보초를 서듯 지켜보던 그 책이 있었다.


병수는 고개를 숙이고 방금 들어온 여자 옆을 지나쳤다.

습관처럼 우물거렸다.

'60점'



지연은 교수님께 간단한 인사를 하고 서둘러 나왔다.

복도 끝 저만치에 그 남자가 절룩이며 계단을 내려서고 있다.

4분 전부터 스무 걸음 뒤에서 숨죽여 따라 걷고 있다.

막상 어떻게 말을 하고 책을 빌려야 할지 떠오르지 않는다.


누군가 자꾸 따라오는 느낌이다.

절룩 거리며 걷는 걸음걸이를 4분동안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뒤 돌아 보았다.

한 여자가 급히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린다.

교수동에서 정문까지 가는 길에 그 여자 외엔 아무도 없다.

'뭐 하자는 거야? 저 여자! 너무 티 나잖아!'

병수는 그 여자에게로 돌아 섰다.


남자가 돌아봤다.

'어떻게 알았지?'

남자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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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 07

밥 기운 때문인지 지연은 슬슬 잠이 왔다.

쿠션을 가슴에 대고 자연스럽게 엎드렸다.

잠이 드려는데 잠결에 옆자리 남자가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오후 3시쯤 되었을까? 병수가 절룩거리며 나타났다.

며칠 쉬었다고 그런걸까? 집에 있을 때보다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다.

영태는 꾸벅꾸벅 졸고 있다.

옆자리에서 처음 보는 여자가 잠을 자고 있다.


"어? 내일 나온다며?"

사람의 움직임을 느꼈는지 영태가 "스르륵" 엉덩이를 빼며 일어났다.

"어 그럴려고 했는데.. 나가자."

병수가 지난번 대출 받은 책을 들고 나갔다.

영태도 휴대폰을 챙겨서 뒤따랐다.


둘은 아주 오랜만에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영태는 게토레이 한 캔을 뽑아 건네주며 병수의 발부터 살핀다.

아직 많이 부어있는 것 같다.

"안나온다더니 좀 괜찮냐?"

"대출 받은 책을 좀 읽으려고 했는데, 자리에 두고 가서 가지러 왔어."

"짜식 핑계 대기는.. 집구석에만 있으려니까 좀이 쑤시디?"

'-_   -;;;'

"오죽 하겠냐? 방구석구석에 CCTV라도 달려 있을지 모르는데.."

"머 그정돈 아니거든? 근데 왠일이냐? 자진해서 음료술 다 뽑아주고?"

"ㅋㅋ 내가 뭘? 원래 예전부터 이랬잖아.. 세삼스럽게.. -0   -;;"

"별 일 없지? 내 옆자리 근호형은 어디 갔냐? 백설공주가 주무시던데.."

"아, 너 발 다쳐서 일찍 가던 날 짐 싸서 고시원 들어갔어."

"아, 그래? "

"그 백설공주가 자꾸 쳐다 본다는 그여자야 -_  -;;"

"자리 잡은 거야?"

"아니 그런 것 같진 않은데 꼭 그 자리에 앉더라."

"이쁘냐?"

"글쎄..그냥 평범해 75점?"

"음.. 그럼 내가 보면 65점쯤 되겠네!"

"새끼! 눈 높은 건 알아줘야돼"

"공부는 잘 되냐?"

"ㅍㅎㅎㅎ 알면서 물어보긴 -_   -;;"

둘은 이야기를 나누는 중간 중간 커피를 마시러 나온 사람들을 향해 손 인사를 했다.


"내일 나올꺼냐?"

영태가 묻는다.

"아니 이참에 이책 가져가서 마저 보고 며칠 더 있다가 나올랜다."

"나 심심하니까 빨랑 보고 나와라."

한참 수다를 떨다가 병수가 책을 들고 먼저 일어섰다.


지연이 잠에서 깨서 휴게실로 나왔다.

한 남자가 다리를 절룩 거리며 휴게실을 나간다.

옆자리 남자가 뒤따라 나갔다.

지연은 '점심에는 커피'를 뽑아서 마셨다.


"60점!"

병수가 나지막히 말했다.

"얼굴에 손자국 나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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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 06

해가 느린 걸음으로 먼 산을 넘어도, 옆자리 주인은 오지 않았다.

'오늘은 오지 않나보다.'

지연은 자리 주인이 나타나 양해를 구하고 책을 먼저 볼 수 있기를 바랬다.

오전에 일었던 흥분은 이미 자취를 감췄다.

배가 고파왔다.

아까 연거푸 실수를 하던 남자가 힐끗 힐끗 쳐다본다. 기분 나빴다.

지연은 내일 일찍 나오기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직도 끝자리의 여자가 가끔 쳐다본다.

'의자 넘어뜨리고 핸폰 떨어뜨렸다고 이렇게 오래 쳐다보나?'

영태는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자신도 힐끗힐끗 쳐다보고 있다.

보면 볼 수록, 평범하지만 한겨울 흰 눈 같이 하얀 여자의 얼굴이다.

소박한 이끌림에 이끌려 여자의 얼굴에 눈길이 갔다.

여자가 일어섰다.

'벌써 가나?'

일어서서도 영태쪽을 한 번 살피고 무언가 생각하더니 뒤돌아서 나갔다.


병수는 정형외과에서 물리치료를 받고 집으로 와서 공부했다.

의사는 인대가 조금 늘어났으니, 당분간 통원치료하고 운동은 삼가라고 했다.

화장실, 정보자료실, 식당, 휴게실 등 활동반경이 도서관보다는 집이 좁았다.

집은 도서관보다 더웠지만, 모처럼 먹는 어머니표 점심은 맛 있었다.

이런 면에서 집이 편했지만, 역시 집중하기는 도서관이 나았다.

책을 보다가 어느순간 컴퓨터를 하고 있다던지, 침대에 누워있었다.

오후에 영태가 전화를 걸어 '어떤 못생긴 여자가 자꾸 쳐다본다'며 짜증을 냈다.

어느덧 매미 소리는 잠잠해지고 귀뚜라미 소리가 들렸다.

창문을 다 열어 놓아도 한여름 저층 아파트에 시원한 바람이 불어들기는 쉽지 않은가보다.

달궈진 아파트 벽과 아스팔트는 달궈진 채로 여름을 날 모양이었다.

무심코 올려다 본 창 밖 하늘엔 별이 하나 희미하게 보였다.

어릴적 여름 밤하늘이 그리웠다.

며칠간 집에 있기로 했다.





지연은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오늘 그 자리 주인을 만나면 양해를 구하고 책을 빌릴심산이다.

어제 그 자리에 앉았다.

이른 아침이어도 여전히 날은 더웠다.

그 기분 나빴던 남자가 어슬렁 거리며 거의 빈 가방을 메고 나타났다.

'jonsport' 여기저기 닳아 헤진 가방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피식 실소가 나왔다.

휴게실로 가 '아침부터 녹차'를 뽑아 들고 왔다.


일반인실로 들어선 영태는 어제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 여자를 보았다.

조심스럽게 자기 자리로 갔다.

가방을 의자 등받이에 걸어놓고 휴게실로 갔다.

"윙~"

동전을 털어 커피자판기에 넣고 밀크커피 한 잔을 뽑았다.

영태에겐 도서관에 나와서 마시는 모닝 커피가 또 하루가 시작 됐음을 알리는 습관이었다.

그 여자가 나타나서 '아침부터 녹차'를 뽑아 갔다.

"사랑을 찾아~ 사랑을 만나 사랑한 나의 모습~"

'허.. 이자식 왠 컬러링!'

병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노래가 2번 반복 된 뒤에 병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다! 오늘은 좀 어때? 오늘도 못 나오냐?"

"어.. 내일까진 집에 있으려구.."

"오후에 농구 한 판 못하니까.. 하루가 길다."

"다른 애들 있잖아!"

"그냥.. 날도 덥고.. 너 없으니깐 별로 생각이 안난다. 아무튼 붓기 빠지고 다닐만 하면 얼른 나와라"

"알았어. 근데 나가도 당분간 운동은 못 할 꺼다."

"그랴.."

영태는 전화를 끊었다.

"맴 매앰 맴~"

휴게실 창 밖에서 매미들이 어지러이 울었다.

'어떤 새끼가 매미가 일주일만 산다고 그런거야! 저 것들은 왜 맨날 울고 지랄이야!'

뜬금없이 매미들을 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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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 05

영태의 자리는 에어컨에서 세번째 떨어진 줄 중앙에 있다.

에어컨 바람이 가장 시원하게 들이치는 곳이다. 물론 겨울엔 온풍이 불어 따뜻하다. 사실 졸리다.

어쨌든 영태가 그 좋은 자기 자리로 향하던 중이었다.

"끼이익~ 콰당!"

등받이의 갈라진 나뭇결에 셔츠자락이 끼어 의자를 잡아 끌어 넘어뜨렸다.

지연은 무심결에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로 옆자리 책상에 대출중이던 그 책이 있었다.

잠시 시선이 머문 순간부터 가슴 깊숙한 곳에서 물결치듯 흥분이 일었다.


늘 다니던 곳이다.

일부러 끼우기도 어려울 것 같은 곳에 셔츠자락이 끼었다.

몇 안돼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상상한 영태는 창피했다.

'아, 쪽팔려'

영태는 의자를 일으켜 세우다 자신을 보고 있는 여자를 보았다.

어색한 눈웃음을 지어보이고 자리에 가서 앉았다.

'아 씨.. 뭘 빤히 쳐다보고그래.. 쪽팔리게..'

이런 상황에선 적어도 2시간은 앉아 있어야 사람들 뇌리에서 좀전의 이벤트가 잊혀진다.


지연은 옆자리 책상에 꽂힌 책들을 살폈다.

꽂힌 책들을 보면, 대충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유심히 보았지만 특별히 어떤 것을 준비중인 지 모르겠다.

일단 중.고등학생은 아니었다.

자리주인은 아직 오지 않았다.


영태는 오른쪽 끝자리에서 자꾸만 자기를 쳐다보는 듯한 시선을 느꼈다.

'아.. 씨, 저여자 뭐야? 자꾸 쳐다보고.. 신경 쓰이게.. 담배나 한 대 피워야겠다.'

책상에 놓인 말보로 담뱃값에서 한 개피를 잡아 뺐다.

"툭! 타다당!"

책상 끝에 올려 두었던 핸드폰을 건드렸다.

핸드폰 겉 케이스가 떨어져 나가며 더 요란한 소리를 냈다.

의식중에 있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돌겠네!'

"죄송합니다."

작은 소리로 양해를 구했다.

영태는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을 주워 밖으로 나갔다.


자꾸 실수를 하는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 남자가 죄송하다고 한다.

지연은 괜찮다는 눈인사를 했다.


급히 나오는 바람에 라이타를 두고 나왔다.

도서관 밖으로 나온 영태는 불을 빌려 연기를 피우고 핸드폰을 살폈다.

얼마전 마음먹고 새로 장만한 핸드폰이다.

겉케이스 한쪽이 깨졌다.

'오늘 무슨 날인가? 아침부터..'

영태는 담배 한 모금을 깊숙히 빨아들였다.

내뱉은 담배 연기처럼 그 여자의 얼굴이 흐릿하게 나타났다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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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 04

지연은 다음날 일찍 일어나 도서관엘 갔다.

당분간 학교보다는 도서관에 들를 생각이다.

서가에 들러 책이 반납 됐는지 검색해 봤지만, 역시 대출중이다.

'재미도 없는 책을 누가 빌려 갔을까?'

딱히 기대는 안했지만, 약간의 실망감에 입술에 힘이 갔다.

서가에서 나와 일반인실로 들어 갔다.

에어컨 근처의 좋은 자리는 대부분 임자가 있는 듯 했다.

물론 그 주인들은 대부분 오지 않은 것 같았다.

지연은 빈자리를 찾아 앉고 책을 폈다.


'이자식 많이 아픈가?' 영태는 병수의 빈 고정석을 힐끗 보며, 병수가 늦는 것에 신경이 좀 쓰였다.


"병수야! 너 다리를 왜 그렇게 절어?"

병수는 모른척 티 안나게 나오려 했지만, 엄마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아.. 어제 도서관 계단에서 삐끗했어."

습관처럼 둘러 말했다.

"어디 보자?"

엄마가 병수의 바지 한쪽을 걷어 올린다.

"이거 많이 부었네! 도서관에 그냥 갈 수 있겠냐? 다 큰 게 조심좀 할 것이지.. 어쩌다가.."

어머니의 걱정 섞인 잔소리가 시작됐다.

"괜찮아. 영태가 잘 아는 한의원이 있다는데.. 거기 가서 침 맞을께요."

병수는 더 듣고 싶지 않은 듯 재빨리 바지를 내렸다.

"자!"

엄마가 만원을 쥐어주며 말한다.

"침 맞고 약국 가서 근육이완제 사먹어. 힘들면 며칠 집에서 공부하던지.."

"알았어."

신발을 신는 것도 쉽지 않았다.

"정형외과부터 가봐!"


"드드드드득~  드드드드득~" 영태의 캔디폰이 모처럼만에 울린다.

영태는 전화를 움켜쥐고 일반인실을 나왔다.

"위이이이잉~ 딱!"

"어. 그래.. 왜 안와?" 영태가 병수에게 묻는다.

"응.. 어제보다 좀 많이 붜서..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다."

"그럼 오늘 못 오겠네?"

"그럴 것 같다."

"한의원에 가볼래?"

"아니 근육이완제 먹고 좀 있으면 괜찮아 지겠지. 아무튼 오늘은 못 갈 것 같다."

"그래 몸조리 잘하고~"

영태는 전화를 끊고 다시 일반인실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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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 03

늘 그렇듯이 저녁을 먹은 병수는 영태와 함께 농구를 하고 들어왔다. 땀에 흠뻑 젖은 면티가 몸에 달라 붙었다.

둘은 화장실에서 땀을 씻어내고 나왔다.

머리 끝에서 땀인지 물인지 물방울이 송글 맺혔다가 떨어진다.

열기로 붉게 상기된 얼굴은 한참 있어야 가라앉을 태세다.

자판기에서 게토레이 한 캔을 뽑아 한모금씩 돌려 마신다.

"아까 떨어지다가 삐끗한 발목이 살짝 쑤시네"

병수가 게임중에 착지를 잘 못한 모양이었다.

"울 엄마 친구가 한의원 하는데 가볼래? 나도 가끔 거기서 침 맞는데, 침 맞으면 괜찮아지더라"

"한 두번도 아니고 괜찮겠지.. 오늘은 좀 일찍 들어가야겠다."

"야, 파스라도 붙이고 좀 더 있다 가"

오늘은 가뜩이나 싱숭생숭하던 영태다.

"그냥 갈랜다. 좀 남았냐?"

병수가 갈증이 덜 풀렸나보다.

"설마!"

영태는 남은 한 방울마저 탈탈 털어 넣는다.

"아씨.. 쫌만 남기지! 니가 하나 뽑아"

"낼 살께. 주머니에 500원 있어."

"진짜 가야겠다. 다리가 좀 붓는 것 같아."

병수의 얼굴이 찡그러졌다.

병수는 한 쪽 다리를 절며 가방을 싸러 들어간다.

영태는 다른 친구들과 남아있다가 다시 나온 병수와 손인사를 한다.

"낼 보자. 발목 많이 부으면 전화 해! 아침일찍 한의원에 같이 가보자"

"그래 알았어! 열공!"

어느덧 구석진 곳부터 어둠이 제법 찾아들었다.



해가 지구 반대편으로 숨어버려도 한여름 달궈진 기온은 쉬 내리지 않았다.

지연은 이미 젖은 손수건을 꺼내 콧잔등에 맺힌 땀을 닦았다.

집으로 향하던 발걸음이 도서관 앞에서 잠시 머뭇 거렸다.

'혹시 반납 됐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너무 더운데다 지도교수님도 고향에 내려가셔서 계획보다 일찍 집으로 돌아왔지만, 시계를 보니 이미 사서들은 퇴근 했겠다.

도서관 현관 자판기 앞엔 땀에 젖은 남자들이 다리 사이에 농구공을 끼고 수다를 떨고 있다.

지연은 멈췄던 발걸음을 이어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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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 02

영태는 어느새 다 마셔버린 캔을 쪽쪽 빨고 있다.

"들어가서 공부나 하자!"

병수가 건너편 휴지통에 빈 캔을 던지며 휴게실을 먼저 나갔다.

영태는 답답한 마음에 의자를 두 손으로 짚으며 일어선다.

"그래! 들어가서 책이나 보자"

"슛~!"

"탁! 툭!"

'아이씨..'

일부러 문까지 걸어가서 캔을 던져보았지만, 휴지통 테두리에 맞고 떨어졌다.

병수는 조심조심 가방을 열고 책을 꺼내 놓았다.

'성격과 직업의 상관관계'

지난주에 2주 기한으로 빌린 책이다.

병수는 한냥대학교 아시아와유럽및아메리카역사문화학과를 4.5점 만점에 3.9점이라는 성적으로 졸업했다.

나름대로 우수한 성적이지만, 웬만한 기업에서 '어서 오세요'하고 받아 줄 만한 인기학과는 아니다.

아직 도서관 신세를 면하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성적 하나만 믿고, 막연히 적당한 기업에 입사하고자 TOEIC 공부를 중점으로 열심히 해왔다.

지난주 토요일 오후 어문학 서가에서 책을 고르던 중이었다.

우연히 구석에 거꾸로 꽂혀있는 이녀석을 발견했다.

누군가 잘못 꽂아 놓은 듯 했다.

"성격과 직업의 상관관계?"

'자신의 직업에 어울리는 성격과 그렇지 못한 성격'으로 시작하는 글귀에 호기심이 생겨 도서대출을 신청했다.


"알아봤어?"

강의실에 발을 들여놓기가 무섭게 민지에게 묻는다.

"다른 학교 도서관하고 국회도서관까지 찾아 봤는데, 그 책은 없어"

"참고할 만한 다른 책은 없어?"

민지가 묻는다.

"꼭 그런 건 아닌데... 아무튼 그 책을 꼭 한 번 봐야 할 것 같아."

준비중인 논문에 참고할 만한 조사자료가 꼭 들어 있을 것 같았다.

"교수님은 계셔?"

손수건으로 흐르는 땀을 닦으며 지연이 묻는다.

"아니, 시골댁이 비피해를 많이 입으셨대나? 일주일 정도 고향에 다녀오신다고 내려가셨어."

민지는 그녀의 사교성 있고 편안한 성격때문인지, 주위의 많은 일상을 꿰고 있다.

"강의실은 너무 덥지 않니?"

"가만히 있으면 참을만 해"

민지가 더운 날씨에 자리 옮기기 귀찮다는 듯 대꾸한다.

"그래도 땀이 계속 나는데.."

지연은 바닥에서 찰랑대는 '아침부터 녹차'가 아쉽다.

"깡!"

멀리서 야구부의 공 치는 소리가 햇볕을 가르고 들린다.

학생들이 비운 교정엔 한 떼의 매미들이 소란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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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 01

찌는 듯한 더위다.

어제까지 보름 넘게 내리던 비는 벌써 다 말라 버렸다.

버스 정류장에서 도서관까지는 10분 남짓 걸어야 한다.

아침부터 내리쬐는 태양을 피해 응달을 찾아 걸어보지만, 바라지 않던 땀 한 줄기가 등골을 타고 내린다.

아침 일찍부터 사람들이 옥수수알 처럼 도서관에 자리를 틀고 앉아있다.

도서관 구석에 세워진 에어컨이 작아 보인다.

에어컨과 먼 곳에 앉은 사람들은 연신 부채질을 하지만 허망한 손놀림일뿐, 더위는 쉽게 떠나지 않을 것 같다.

"왔냐?"

벌써 그 자리에서 3년째 공무원시험을 준비중인 영태다.

"일찍 나왔네? 오늘 무척 덥다. 어제까진 비좀 그쳤으면 했는데, 비가 그리워 질 것 같아"

가방을 책상에 올려 놓으며 병수가 대꾸했다.

"나와!"

영태는 눈짓을 하며 휴게실로 향한다.

병수는 자판기에서 제일 저렴한 500원짜리 캔커피를 두개 뽑아 들었다.

"신문 봤냐?"

영태가 받아 든 캔커피를 따며 묻는다.

"아니"

"아... 미치겠다. 경남에 9급 경쟁율이 1600:1이래 젠장!"

"뉴스에서 보긴 했는데..."

영태에게는 올해가 서울에서 보는 마지막 나이제한에 걸린 해다.

그런 신문기사 한 줄이 주는 답답함이 클 수밖에 없다.

"개나 소나 만만한 게 9급 공무원이니.. "

"야! 너 올해는 나름 열심히 하고 있잖아. 잘 될꺼야."

둘은 이제는 너무 익숙한 긴 한 숨이 피식 새어나온다.



"엄마, 나 구립에 좀 갔다가 바로 학교로 갈꺼야. 오늘은 많이 늦을 것 같아"

"도서관엔 뭐하러? 학교 도서관 가면 되잖아!"

"아, 지난번에 논문에 쓸 참고자료를 봐 둔 게 있거든! 나 바빠"

샌들에 반바지, 베이지색 면티를 간단히 걸치 듯 입고 가방을 채듯 나선다.

지연의 집은 구립도서관 건물 뒤의 아파트다.

언제든 약속이 없으면 문 닫을때까지 책을 보곤 한다.

"응, 누가 빌려갔네.. 지난주에도 있었는데.."

힘없이 휴게실 문을 열었다.

"아니, 학교 도서관엔 없어"

"어쩔 수 없지.. 기다려보는 수 밖에.. 알았어. 학교에서 보자"

"뚝" 전화를 끊고 자판기에 동전을 넣었다.

몇개의 탄산 음료는 벌써부터 매진에 불이 들어와있다.

'아침부터 녹차'를 뽑아 들고 휴게실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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